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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367

죄 많은 소녀 죄 많은 소녀 충격적인 영화다. 주제,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 모두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탁월하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작품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국영화는 가능성과 희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여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한 여학생의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살해하는가'에 관한 핍진한 관찰 기록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의 심리를 건드린다.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 뿐 아니라 음악, 음향, 인물들이 놓여 있는 극단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도록 한다. 경민이 실종되고, 담임 선생과 형사들은 전날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불러 경민의 실종에 관해 묻는다. 학교에 오지 않은 경민의 부재.. 2021. 3. 7.
위로공단 위로공단 한국에서 노동자의 삶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예술 작품은 1990년대 이후로 찾아보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폭력을 휘두르던 시기와 노동운동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의 노동자는 1960년대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이 만든 '산업화' 전략의 결과물이다. 그 전까지 농업국이던 한국이 경공업 제조를 시작으로 '수출입국'을 국가의 경제전략으로 채택한 이후, 독재정부와 자본가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이 절실해졌다. 독재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정책은 구체적으로 개인의 삶에 직접 타격을 가한다. 박정권은 농민의 삶에 기본이 되는 쌀값을 '저곡가 정책'으로 유지하면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와 공업단지의 노동자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든다. '저곡가 정.. 2021. 2. 20.
언니 언니 주제도, 내용도 훌륭한데 시나리오와 연출이 아쉽다. 이 정도 내용이라면 정통 액션 스릴러로 충분하겠다. 이시영의 액션도 좋고, 여성 주인공이 악한 짓을 저지른 남성들을 응징하는 내용이라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만든 작품 '데쓰프루프'의 여성 주인공들이 벌이는 멋진 활약이나 '킬 빌'에서 우마 서먼이 보여주는 뛰어난 액션 등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인데, 어중간한 액션으로 끝난 것이 퍽 아쉽다. 인애는 무술로 단련된 경호원이다.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은혜는 발달장애인이지만 일반 고등학교에 다닌다. 은혜는 학교에서 일진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성매매 도구로 그들의 돈벌이에 쓰였으며, 동네에서 가게를 하는 중년의 남성들에게 성폭행당한뒤 인신매매 조직에 팔린다. 납치 당한 동생을 찾는 인애는 최초의.. 2021. 2. 5.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심각한 사회 문제를 코믹하고 유쾌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에린 브로코비치'와 비슷하다. 영화는 학벌, 여성, 성차별, 유리천정, 성평등, 기업범죄, 환경오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내부자 고발, 여성들의 우정 등 매우 많은 요소를 버무려 만들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이런 영화가 나올 수는 없으니까 - 그랬다가는 여성운동, 페미니스트들의 강력한 펀치를 맞게 될 것이 뻔하므로 - 영리하게 시간을 1990년대 중반으로 돌렸다. 한국의 한 재벌기업인 삼전기업에서 일하는 자영, 보람, 유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회사에 취직했다. 첫 장면부터 학력이 낮은 여성이 회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보여준다. 직급이 높은 남성 노동자를 위해 커피를 타는 여성 노동자들은 특히 그들만 유니폼을 입었다. .. 2021. 1. 27.
벌새 벌새 1994년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다행히 2년 전, 산본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한 것이 30년 동안 살아온 보람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동네 빈민촌에서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어렵게 집을 마련했으니 큰 짐은 덜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 출판사,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수입은 적었고, 그나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 이 무렵 써 놓은 일기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 1994년 6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었다. 2대 2로 비긴 경기. 나.. 2020. 12. 27.
2NE1, 블랙핑크 2NE1, 블랙핑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로 '블랙핑크 : 세상을 밝혀라'을 봤다. 한국의 대중가요에서 특히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세계로 퍼져나가는 음악을 K-POP으로 부른다. 많은 아이돌 그룹이 세계 순회공연을 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BTS와 블랙핑크가 단연 돋보인다. 나는 아이돌, 아이돌 그룹에 거의 관심이 없다. 내가 '꼰대'이라서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음악 취향과 음악성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지금도 항상 듣는 음악이 2NE1이다. 투애니원은 이미 공식 해체한 그룹이다. 그룹 리더인 '박봄'도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으니, 이들도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투애니원의 음악이 참 좋다. 여느 걸그룹과.. 2020. 10. 16.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몇년 전, 이 영화를 보고 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리뷰를 쓰지 않고 지나갔다. 엊그제 '다스뵈이다'에서 김어준 총수가 이 영화를 다시 언급했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분명 낮게 평가된 영화라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복남...'은 김기영 영화 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이 영화를 만든 장철수 감독이 김기영 사단에서 조연출로 오래 일했고, '김복남..'으로 장편 데뷔를 했으니, 장철수 감독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영화이면서, 그가 배운 김기영 영화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김복남...'은 여성주의 영화, 여성영화,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근본으로 보면 이 영화는 '스팔타쿠스.. 2020. 10. 1.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감독 홍원찬이 낯설어서 영화를 보고 나와 찾아봤다. 이 영화는 세 번째 감독 작품이지만, 이미 '추격자', '작전', '황해'를 각색한 경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검증된 것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목을 끌고 다니는 듯한 격렬한 감정이 이어졌다. 하드보일드 액션 느와르.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다. 나중에 봤지만, 포스터에도 '하드보일드 추격 액션'이라고 써 있는 걸로 봐서, 감독은 '하드보일드'한 연출에 특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 주인공 인남(황정민)과 레이(이정재)는 영화에서 웃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 없다. 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은 결코 웃을 만큼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설.. 2020. 8. 9.
강철비2 : 정상회담 강철비2 : 정상회담 우선, 이 영화는 재미있다. '강철비'(1편)도 매우 재미있게 봤지만, 2편인 이 영화도 1편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재미있게 봤다. 영화에서 의외로 잠수함 관련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잠수함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의 U보트가 대표적이고, 크림슨 타이드, 헌터 킬러, U-571, 특전 U보트 등이 있는데, 최근에 본 '그레이하운드'는 독일 잠수함이 등장하지만 구축함 위주의 해전 영화여서 이 영화와 직접 비교하긴 어렵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북한의 핵잠수한 백두호는 가상의 잠수함으로, 잠수함에 핵탄두를 장착해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핵잠수함 가운데 가장 진화한 것으로, 미국과 러시아만 가지고 있는 기술을 북한이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잠수함에서의 액션.. 2020. 8. 1.
사라진 시간 사라진 시간 정진영 배우의 첫 감독 연출작품. 그가 배우를 하기 전에 연출부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배우보다 감독이 되고 싶었고, 30여 년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연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정진영의 첫 작품은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르지 않은, 신선한 시도였다. 이 영화를 두고 장자의 '호접몽'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꿈을 꾸는 나와 꿈속의 나, 꿈속에서 꿈을 꾸는 나에 관한 설정을 다룬 영화는 여럿 있다. 이 영화는 꿈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정체성'에 관한 영화로 읽는 것이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정체성에 관한 최고의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자기가 거대한 벌레로 변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족 모두.. 2020. 7. 11.
사냥의 시간 사냥의 시간 시나리오가 많이 안타깝다. 명작 '파수꾼'을 연출한 윤성현 감독의 작품이라면 이보다는 훨씬 나은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는 너무 감상적이고, 감성적이다. 그것이 이 어설픈 세 청년의 수준과 맞는 사실에 가까운 설정이라면, 영화 분위기-아포칼립스-와 괴리가 크다. 따라서 인물과 시대가 동질성을 가지려면 이 영화는 악당에 의한, 악당을 위한 영화가 되어야 한다. 미장센이 아무리 훌륭해도 시나리오가 탄탄하게 받쳐주지 못하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미장센은 시나리오의 배경이지 본질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치콕 감독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시나리오, 시나리오, 시나리오'라고 했다. 준석, 장호, 기훈은 조직폭력단이 운영하는 사설도박장을 턴다. 이 장면에서 단 한.. 2020. 4. 25.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주의 : 강력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흥행하지 못한 몹시 안타까운 영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연출도 좋은 이 영화가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감염병 때문이니, 감독과 배우 모두 운이 없었다. 깊은 위로의 말을 드린다. 일본 작가 소네 케이스케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김용훈 감독이 각본, 연출한 이 작품은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감독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만들었고, 연출도 좋았다. 다만, 데뷔작을 창작이 아닌, 다른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는 모두 네 부분으로 나뉘고, 각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르거나 중첩한다. 그리고 에피소드는 시간의 흐름대로 배치하지 않고, 뒤섞여 놓음으로써.. 2020. 4. 19.
기생충-빈민의 시각 [영화] 기생충-빈민의 시각 1975년으로 기억하고 있는,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꾼 물난리가 있었다. 우리는 마포에 살고 있었는데, 용산에서 서강으로 이어지는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기찻길 아래로 거대한 철둑이 이어지고, 철둑 아래로 개천이 흐르는 굴이 두 개 있었다. 우리집은 하천 바로 옆에 허름하게 지은 무허가 판자집이었고, 이때만해도 서울의 도시빈민들이 사대문 밖에 모여 살았다. 아버지가 시내 나들이를 할 때, '문안 다녀온다'고 말하는 것은, 조선시대식 표현이었다. '진짜' 서울은 사대문 안쪽을 말하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우리는 도시빈민이었지만, 방이 무려 세 개나 되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같은 마을의 빈민들 가운데서도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했다. 우리.. 2020. 2. 9.
남산의 부장들-치졸한 권력자의 종말 남산의 부장들-치졸한 권력자의 종말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중심으로 긴박했던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약 40일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건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므로 지금도 가끔 이 사건은 언급되고 있다.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으로 이 사건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영화로 만나는 역사의 순간은 살아 있는 인물의 개성과 물성,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갈등을 감정적으로 느끼는데 의미가 있다. 영화 속 인물과 실제 인물은 분명 다르지만, 이들이 속한 집단-군사독재 권력-의 속성을 이루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큰틀에서는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이 개연성 있다고 본다. 박정희 암살 사건의 단초가 되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김형규 이전의 중앙정보부.. 2020. 1. 26.
블랙머니 블랙머니 한국의 금융범죄를 다룬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며, 영화의 재미를 위해 몇 가지 장치를 설정했다. 초반 두 명의 핵심관계자가 타살되고, 담당 검사가 피의자 성추행범으로 지목되며, 펀드투자사의 자문변호사가 한국여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두 극적 장치를 위해 설정했으며, 본질은 영화의 마지막에 검사 양민혁의 고발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론스타 펀드 대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투자분쟁'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요약하면, 론스타 펀드는 이미 70조 가치의 외환은행을 2조에 매입해 순이익 5조원 이상을 남기고 팔았다. 론스타 펀드는 외환은행 말고도 부실채권 매입, 동양증권 빌딩, SNC사옥, 스타타워, 극동건설 등을 헐값에 매입해서 되팔아 5천억 이.. 2019. 11. 18.
[영화] 악인전 [영화] 악인전 이 영화가 이미 무수히 제작되어 관객들이 싫증을 낼 정도가 된버린 ‘조폭' 영화와 다른 점은, 버디 무비라는 것과 조폭 두목과 형사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버디 무비라면 주로 형사 둘이 주인공이거나, 조폭 둘이 주인공이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조폭 두목과 형사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협력은 하지만, 서로 끝까지 경계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대를 경계한다. 영화 ‘신세계'처럼 비장함이 흐르지도 않고, 캐릭터의 행동에 중의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제목이 적확하게 말하듯, 이 영화의 주인공 세 명은 모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다. 조폭 두목인 장동수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인물이고, 범죄로 번 돈으로 호사한 생활을 누리며, 부하들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자기 사업에 걸림.. 2019. 10. 8.
[영화] 극한직업 [영화] 극한직업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영화 뿐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렇다. 다만 '재미'의 개념, 기준, 주관적 판단, 의미, 수준과 같은 무궁한 영역이 은하계처럼 퍼져있으니 그것까지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재미있다고 여기면 그 영화는 좋은 영화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2시간 동안 현실을 잊고 영화 속에 몰입해 순수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도 좋다. 영화의 장르가 다양한 것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관객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듯,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한다. 물론 자본의 거대한 홍보의 폭우로 인해 세뇌에 가까운 정보의 물결에 휩쓸려 영화를 보게 되는 부작용도 있지만, 요즘 관객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자기가 판단해서 재미.. 2019. 2. 7.
[영화] 말모이 [영화] 말모이 일제강점기 시기, 매국노를 제외한 민중들의 삶은 노예로 전락해 고통스럽다. 저항하지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말을 지키려는 극소수의 학자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우리말을 훌륭하게 읽고, 쓰고, 말하고 있다. 말과 글이 곧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지만, 그것을 지켜온 지난 역사가 얼마나 고되고 험난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조선의 우리말 학자들의 활약을 그렸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역사에서도 유명하고, 해방 뒤에 우리말 사전이 곧바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판수'라는 무지한 민중.. 2019. 1. 20.
[영화] 마약왕 [영화] 마약왕 범죄 영화, 특히 마약을 다루는 범죄 영화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를 보면서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영화들-좋은 친구들, 비열한 거리, 카지노-이 떠오르고, 알 파치노 주연의 '스카페이스'도 떠오른다. 심지어 그동안 한국영화 가운데 범죄영화에서 볼 수 있는 클리셰들도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 부산 일대를 무대로 벌어지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범죄와의 전쟁'과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범죄와의 전쟁'이 1980년대 초반의 이야기라면, 이 영화 '마약왕'은 그 직전의 시기인 1970년대 부산과 한국의 시대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600원일 때, 마약왕 이두삼은 10억원을 벌었다. 그는 대만에서 원료를 밀.. 2019. 1. 14.
[영화] 국가부도의 날 [영화] 국가부도의 날 영화는 특별하거나 대단하지 않았다. 대개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미국과 자본의 발톱은 날카롭고 악랄했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능과 자본의 탐욕이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구제금융시기의 나와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았나를 떠올렸다. 구제금융이 시작되기 1년 전에 나와 아내는 결혼했다. 아내는 직장에 다녔고, 나는 집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백수였다는 말이다. 결혼하던 때, 그러니까 1996년 10월 무렵에 우리는 부천 중동의 신도시 변두리에 있는 아파트를 샀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산본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아내가 가지고 있던 돈과 은행에서 돈을.. 2019. 1. 4.
[영화] 뫼비우스 [영화] 뫼비우스 김기덕 감독 19번째 작품. '강력한 19금'. '세르비안 필름' 만큼은 안 되어도, 꽤 충격적인 영화다. 영화의 일부 장면에서도 충격을 받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 의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 충격을 받았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충격이다. 90분짜리 영화를 만들면서,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럼에도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이해되고, 극중 인물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현실'은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김기덕 감독의 '현실'은 그 자체로 상징이며 은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중에서 벌어지는 어떤 '행위'는, 그 행위를 .. 2018. 11. 20.
[영화] 서울의 휴일 [영화] 서울의 휴일 1956년 개봉. 제목을 보면 3년 전 개봉한 '로마의 휴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오드리 헵번을 기억하게 만든 그 유명한 영화 '로마의 휴일'이 전후(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지만 미국영화다. '서울의 휴일'은 '로마의 휴일'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남자 주인공이 기자라는 점이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은 미국기자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과 3년이 지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주인공 부부가 사는 집은 이제 새로 지은 깨끗한 2층 양옥집이다. 여주인공 희원은 산부인과 의사, 남주인공 재관은 조선일보 기자다. 신혼부부인 두 사람은 모처럼 휴일을 맞아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하.. 2018. 11. 15.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8년. 신상옥 감독 작품. 최은희, 김승호, 황정순 등 최고 배우들이 나온다. 최은희는 외모가 상당히 도회적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현대적 미인형이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이 지난 서울 거리를 볼 수 있는데, 문안(사대문)의 거리는 사람들이 많고, 자동차도 여러대 다닌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사람들은 바쁘게 거리를 오간다. 이 시기에 거리에는 상이군인과 넝마주이, 구두닦이들이 많았는데, 국가는 이들을 보호하지 않았고, 부랑자, 불량인으로 취급했다. 주인공 소영은 법대를 다니는 학생인데, 집안이 어려워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취직을 하려한다. 하숙집에는 하숙비가 3개월치 밀렸고, 하숙집 주인남자는 소영에게 치근거리고, 취업면접을 보러 .. 2018. 11. 15.
[영화] 로맨스 그레이 [영화] 로맨스 그레이 1963년 개봉. 신상옥 감독 작품. 배우들이 굉장하다. 김승호, 최은희, 한은진, 신영균, 김희갑 등이 등장한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당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려는 생각에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의 시간이 지난 서울은 여전히 황폐하다. 도심에 빌딩이 몇 채 보이긴 하지만 도로는 문안(사대문)의 중심가 일부일 뿐이고 차는 드물게 다닌다. 도로에 차선이나 횡단보도, 신호등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교수의 집과 사장의 집은 퍽 고급해서, 그 시기의 부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볼 수 있다. 기혼 여성들의 다수는 여전히 한복을 입고 다니는데, 한복 위에 모피코트를 입는 모습을 보면, 부자들은 외래 문물-이래봐야 거의 미국의 문화겠지만-을 .. 2018. 11. 15.
[영화] 맨발의 청춘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작품. 1964년 개봉. 누벨바그 느낌이 강한 영화로, 60년대 초반 청춘의 삶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남녀는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지키며 세상을 버린다는 내용이다.신파와 순정 로맨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듯한 시대에 반항하는 인물의 등장, 극단적이고 비극적 결말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린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과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눈물이 난다.이 이야기를 좀 비틀어보면 어떨까. 깡패 두수는 전쟁 고아로 자랐다. 그는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늘 배고픔과 애정결핍으로 반항적인 소년이었다. 고아원 원장은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과 물품을 빼돌려 사욕을 채우고, 원생들은 늘 낡고 더러운 옷을 입고, 싸.. 2018. 11. 13.
[영화] 살인마 [영화] 살인마한국 호러영화의 초기 작품. 시나리오도 좋고, 영화의 만듦새도 뛰어나다. 1965년 발표작이니 당시로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영화다. 그 시기 최고의 배우였던 도금봉, 이예춘, 남궁원, 이애란, 추석양 등이 출연했고, 특수효과까지 써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영화는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느낌으로, 영화의 초반부는 프리츠 랑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보인다. 삭막하고, 낯선 공간, 텅 비어 있는 공간에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 장면은 지금은 낯익은 표현이지만, 당시로는 꽤 진보적 표현방식이었다.시나리오와 연출도 세련됐다. 낯선 공간, 뜻밖의 인물, 죽은 아내의 초상화로 시작하는 발단은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아내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부터 집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 .. 2018. 11. 13.
[영화] 휴일 [영화] 휴일 한국의 누벨바그 영화로 불릴만한 이만희 감독의 작품. 1950-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한 누벨바그 경향은 기성 영화에 대한 비판적 사조로, 새로운 감독, 새로운 작품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 시기 대표적 감독으로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릴 로메르 등인데, 이들이 거의 1920년대에서 30년 초반에 출생한 30대 감독이라는 점에서 이만희 감독도 매우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이 놓여 있던 특수한 상황-1968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군국주의, 독재주도의 경제발전이 이제 막 시작되려하던 시기, 전쟁의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기, 국민의 절대다수가 빈곤으로 고생하던 시기 등등-에서 가난한 여인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두.. 2018. 11. 4.
[영화] 암수살인 [영화] 암수살인 태풍이 지나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미친듯이 허공을 할퀴는 오전, 여전히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는 2층의 방수 상태를 보면서, 아내와 둘이 하남 별마당으로 갔다. 비바람이 거센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모두들 집안에서 태풍이 지나가길 숨죽이며 기다리는 듯 했다. 토요일 오전이면 도시에서 내려오는 차들로 길이 막히곤 했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하남 별마당 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주차장이 한산했다. 덕분에 우리는 느긋하게 좋은 자리에 차를 세우고, 팝콘과 콜라를 산 다음, 극장 앞 테이블에 앉아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우리집의 관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옥상 방수를 하면서, 태양광 패널을 해체해야 하는데, 뜯는 김에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가정집 전기.. 2018. 10. 6.
[영화] 공작 [영화] 공작 잘 만든 영화. 재미있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실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 시기를 살아온 우리는 정작 이 이야기를 처음 보고 듣는다. 총풍 사건은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박채서가 군인 신분으로 대북 공작을 벌이다 안기부에 사업 전체가 이관되면서 안기부와 함께 대북 공작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그의 증언으로 드러난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흥미진진하다. 보통의 첩보 스릴러 영화라면 액션도 있고, 총도 쏘겠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로만 진행되고, 그 대화가 관객의 몸을 떨리게 할 만큼 긴박하고, 스릴 넘치며 감동을 준다. 북한의 핵 개발 진행 상황을 캐내려는 안기부의 공작은 상당히 성공하지만, 그 정보가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에게 보고되지는 않았.. 2018. 8. 15.
[영화] 그날, 바다 [영화] 그날, 바다 세월호 침월 원인을 두고, 이 영화는 가능한 객관적 자료와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접근한다.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에서 발표한 정부의 공식 자료는 전부 또는 일부 조작되어 오염된 자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검찰은 세월호 관련 수사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이 사건을 법적으로 끝내려고 하지만, 그건 박근혜 정부에서 저지른 행위이므로 원천적으로 무효다. 박근혜 정부의 검찰은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수작이 뻔하게 드러났으므로 세월호의 침몰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이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이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이미 김어준이 진행하던 팟캐스트 '파파이스'에서 어느 정도 공개한 적이 있다. 해군이 가지고 있는 공식 항적 데이터를 20분의 거리만큼 아래.. 2018.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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